# 남, 자신실패 인정

풍도의 길 / 저자 : 도나미 마모루 : 임금이 아니라, 나라에 충성, 만인과 다투지 않는다, 매사에 실무를 중시한다

modest-i 2016. 10. 24. 10:36

도서명 : 풍도의 길  
저자 : 도나미 마모루
역자 : 허부문, 임대희
출판사 : 소나무 출판사
홈페이지 : http://www.sonamoo.or.kr
발행일 : 2003 년 06 월 07 일
쪽수 : 352 쪽
판형 : 147*200 mm
판수 :
가격 : 13000 원



세계 역사상 '충성과 절개'에 대해 지금까지 이토록 치열하게 논쟁을 불러일으킨 사람이 있었던가? 5왕조 8성씨 11군주를 섬긴 시골뜨기 출신의 이 '쓰러지지 않는 노장'[不倒翁] 풍도에 대한 최초의 본격적인 역사 평전!


피비린내 나는 쿠데타의 시대를 변절자와 간신이란 비난에도 불구하고

'임금이 아니라, 나라에 충성한다!'

'만인과 다투지 않는다!'

'매사에 실무를 중시한다!'

는 신념으로 걸어나간 풍도의 길을 통해 끈질긴 중국인의 초상을 다시 발견한다.



머리말
오대십국에 대한 간단한 소개
오대의 건국과 멸망을 둘러싼 주요 인물들과 연표
독자들께 드리는 말씀

1. 당 왕조의 붕괴
풍도, 태어나다
안록산의 반란이 남긴 것
백낙천의 풍자시 「소금 장수의 아내」
차의 밀매
황소의 반란

2. 풍도, 옥에 갇히다
「꽃밭 가꾸기에 대해 읊다」
노룡군의 독립적 전통
유인공과 유수광
풍도, 유주참군이 되다
풍도, 옥에 갇히다

3. 환관 장승업을 만나다
주전충과 이극용
하동의 감군사 장승업
풍도, 장승업에게 의지하다
호류 고개의 전투

4. 아버지의 죽음
이존욱, 마침내 왕위에 오르다
한림학사 풍도
이사소가 지닌 재물의 힘
업도에서 일어난 쿠데타

5. 재상이 되다
만인과 다투지 않는다
「토원책」을 둘러싼 이야기
과거의 사례, 현재의 형세
섭이중의 사회시 「농부를 아프게 하는 노래」
안중희, 권력을 휘두르다

6. 매사에 실무를 중시하다
명종의 죽음
매사에 실무를 중시하다
6개월 동안의 실직

7. 풍도, 거란으로 사신 가다
연운 16주를 요나라에 넘겨주다
풍도, 거란으로 사신 가다
추밀원을 폐지하다

8. 대학살을 저지하다
태평성대의 어진 재상이기에
유격전과 대학살
쿠데타로 거란인을 축출하다

9. 자서전을 쓰다
3년 동안의 은거직, 그리고 옛친구의 죽음
자서전을 쓰다
군주에게 충성하는 것이 아니라 나라에 충성한다
익살

10. 풍도의 죽음
곽위, 군사를 일으키다
후주가 세워지다
시영이 북한을 직접 토벌하다

맺음말
문고판 후기
옮긴이의 글

풍도에 관한 최근의 연구
이 책의 내용과 관련된 연표
풍도를 둘러싼 오대 왕조 연표
주석
찾아보기



경향신문
올해 초 그가 노무현(盧武鉉) 정부의 초대 총리로 하마평에 오를 때 함께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 풍도는 누구인가.
'입은 화를 불러들이는 문이요, 혀는 몸을 베는 칼이로다. 입을 닫고 혀를 깊이 감추면, 가는 곳마다 몸이 편안하리라' (口是禍之門 舌是斬身刀 閉口深藏舌 安身處處宇). 전당시(全唐詩)에 풍도가 지었다고 전하는 시이다. 중국 오대십국(五代十國) 시대에 다섯 왕조에서 8개 성씨의 군주 11명을 모셨다는 풍도의, 난세를 살아간 처세술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그러나 스스로는 그토록 입조심을 했건만 정작 후대에는 고위관료의 처신이 문제가 될 때마다 빠짐없이 회자되고 있으니 이만한 역설도 흔하지 않다.
풍도는 우리나라에 최치원이 지은 '토황소격문'으로 널리 알려진 황소(黃巢)의 난이 대륙을 휩쓸던 882년 중국 허베이에서 태어났다. 그러다 20대 후반에야 유주절도사 유수광의 휘하에 들어가면서 관리를 시작했다. 당의 변경인 유주는 유달리 하극상 등에 의해 절도사가 쉼없이 바뀌는 지역이었다. 그가 처음 모신 유수광도, 역시 이전의 주군을 몰아내고 절도사에 오른 아버지 유인공을 강제로 밀어내고 절도사가 된 인물이었다.
풍도의 처음이자 마지막 좌절은 대연(大燕)을 세우고 황제에 오른 유수광의 정벌에 정면으로 반대하다가 옥에 갇히면서 찾아왔다. 군벌의 쿠데타가 생활화된 유주에서의 하급관리 경험은 그의 입을 평생 다물게 했다. 그는 환관 장승업의 추천으로 진왕 이존욱의 휘하에 관리로 재등용되면서 출세가도를 달린다. 47세인 929년 후당(後唐)의 재상이 된 이래 23년간 약간의 우여곡절에도 권력의 정상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절묘한 줄타기의 달인이었다. 후당 명종의 양자 이종가가 명종의 둘째아들 이종후를 쳐내고 황제에 오를 때 황제 추대문서를 쓰게 한 것도 풍도였다. 또 명종의 사위 석경당이 거란의 도움으로 후진(後晋)을 건국했을 때도 풍도는 여전히 재상이었다. 65세인 947년엔 아예 거란의 신하가 됐다.
중화사상의 한족에게 풍도가 곱게 비칠 리가 없다. 게다가 그 왕조 속에 한족이 아닌 이민족, 거란이 세운 요(遼)와 두명의 황제가 들어있으니. 후대의 그에 대한 평가는 냉혹했다. 희대의 간신이자 변절자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역사가마다 '두 임금은 섬기지 않는다(不事二君)'는 유교적 잣대를 갖다대고 난도질했다. 그러나 그는 후대로 내려올수록 정반대의 평가를 받는다. 이는 유교적 가치관의 쇠약과 궤를 같이 한다. '풍도가 살았던 때에 충절을 다할 만한 왕조가 있었던가. 왕조 교체 과정에서 백성들의 대참사가 적었던 것도 풍도가 절개를 중시하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일본의 소설가 진순신)
'임금이 백성을 편안하게 해주지 못하면 신하라도 백성을 편안하게 해주거나 먹여 살려야 한다. 풍도는 신하가 원래 해야 하는 책임을 완수했다. 백성들이 전란의 참화를 모면할 수 있던 까닭은 풍도의 덕분이다'(명의 사상가 이탁오)
그는 관계에서 물러난 뒤 자서전에서 자신을 '나라의 은혜를 받으면서 가법을 따랐고'라거나 '나라에 충성을'이라고 자평했다. 섬긴 대상에 군주라는 말은 보이지 않는다. 그의 평가가 후대에 달라진 이유이다. 고총리가 후대에 어떤 평가를 받을지도 누구를모셨느냐보다 무엇을 위해 일했느냐에 달려 있을 듯하다. - 김윤순 기자 ( 2003-06-23 )


세계일보
서기 907년 당나라가 멸망하고 960년 송나라가 건국할 때까지 중국은 수많은 나라가 건국과 멸망을 거듭하니 이 때를 '5대10국' 시대라고 한다.
이 환난의 시기에 5왕조 8성씨 11군주를 섬긴 신하가 있었는데 그가 바로 풍도다. 군주를 바꿔 가며 23년간 재상을 지낸 풍도에 대해 설거정, 구양수 등 후대 문인들은 절개와 염치가 없는 인물이라는 혹독한 평가를 내렸다. 그러나 풍도는 환난에는 자신의 녹봉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 구제하고자 했고, 거란 황제에 간하여 백성들의 학살을 저지하기도 했다. '나라에 충성한다'는 풍도의 말처럼 그는 섬기는 왕은 바꿨어도 백성은 버리지 않았다.
그는 과연 현신(賢臣)인가 아니면 간신배인가. 풍도에 대한 도나미 마모루의 새로운 평가. - 엄형준 기자 ( 2003-06-21 )

조선일보
풍도(馮道·882~954)는 전통시대 동아시아에서 변절자이자 간신의 전형으로 손꼽혀온 인물이다. 당나라 멸망에 뒤이은 5대10국의 혼란기에 다섯 왕조에 걸쳐 11명의 군주를 섬긴 이력 때문이다.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 것을 신하의 도리로 여긴 유자(儒者)들은 풍도를 신의 없는 배신자로 몰아붙였다. '충성스럽지 않은 신하는 제 아무리 재능이 많고 공적이 빼어나도 훌륭하다고 볼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소중한 절개를 잃었기 때문이다.' 송나라의 정통 사학자 사마광이 「자치통감」에서 풍도를 평한 구절이다. 명나라 말기의 사상가 이탁오 정도가 '풍도는 백성을 편안하게 해주고 먹여 살리려고 노력했다'며 변호했을 뿐이다. 하지만 이탁오는 당대에도 이단으로 몰릴 정도로 비주류였다.
교토대 교수를 지낸 저자는 파란만장한 격동기를 살아간 지식인 풍도의 삶을 당대의 사회와 연결시켜 설득력있게 그려낸다. 풍도가 활동한 5대10국은 907년 당나라가 멸망한 후부터 960년 송나라가 건국할 때까지 반세기다. 화북에선 후량, 후당, 후진, 후한, 후주가 차례로 등장했고, 화남에선 오, 남당, 오월, 민, 형남, 초, 남한, 전촉, 후촉, 북한 등 10나라가 있었다. 쿠데타와 전쟁이 밥먹듯이 되풀이되던 시기였다.
스물여섯에 유주 절도사 유수광 아래서 관료 생활을 시작한 풍도는 40대 중반 후당의 재상이 된 이래 30여년간 고위직으로만 떠돌았다. 그가 섬긴 왕조 중엔 돌궐계 부족이 세운 후진은 물론, 이민족인 거란도 포함돼 있다. 중화사상에 빠져있던 유교 지식인들이 풍도를 더욱 거세게 비난한 것은 이런 이유도 크다.
풍도의 생존전략은 '만인과 다투지 않는다'로 요약할 수 있다. 군사력을 장악한 절도사 등 무신들이 활개치는 세상에서 풍도는 일찌감치 문신으로서의 한계를 절감했다. 최고위직에 올라서도 군사 일에 관여하지 않은 이유는 그 때문이다. 보잘것없는 집안 출신인 그가 빈번한 왕조교체에도 불구하고 계속 중용된 이유는 역시 덕망과 능력 덕분이었다. 「책부원귀」는 '풍도는 성품이 청렴하고 검소해서, 어떤 뇌물도 받지 않았다'고 풍도의 인간성을 평한다. 그는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손바닥 뒤집듯 당적을 바꾸는 요즘 철새 정치인과는 차원이 달랐다.
풍도에게서 「2인자의 철학」을 끄집어내고 싶은 유혹을 받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잦은 정권 교체 속에서 온갖 비난을 뚫고 살아남은 풍도의 처신은 주은래와 김종필, 나아가 요즘의 고건 총리까지 자연스레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풍도는 섬길 만한 군주가 제대로 없던 당시 상황의 산물이었다. 풍도는 만년에 쓴 자서전에서 '집안에 효도하고, 나라에 충성했다'고 회고했다. 저자는 풍도가 충성을 바친 대상이 군주가 아니라, 나라 곧 백성이었다는 데 주목한다. 오대와 같은 난세에 하나의 왕조나 한 사람의 군주에 대해서만 무조건 운명을 같이해야 한다면, 목숨이 몇 개가 있어도 살아남기 힘들었을 것이다. 백성이 주인되는 오늘날의 민주주의 사회에서 풍도를 다시 적극적으로 재평가해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 김기철 기자 ( 2003-06-28 )


중앙일보
인물 평전'풍도의 길'은 '중국사 희대의 간신(奸臣) 구하기'에 바쳐진 저술이다. 다섯개 왕조의 열한명의 군주를 차례로 섬긴 인물, 그래서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개와는 담을 쌓았던 사람인 풍도(馮道.882~954.초상화)가 이 책에서 조명받고 있다. 따라서 이 책의 입장은 '자치통감'을 남긴 사마광의 인물 평가를 정면에서 뒤집는 쪽을 선택하고있다.
'정절을 지키는 여인은 두 지아비를 따르지않고, 충성스런 신하는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 풍도가 착한 일 몇가지 했다한들 어찌 괜찮다고 말하겠는가?' 사마광은 이런 단언으로 풍도에 대한 후세의 판단을 일찌감치 규정해둔 핵심이다.
그러나 이 책을 지은 도나미 마모루(전 교토대 교수)는 설득력있는 '풍도 복권'작업에 몰입한다. 사마광은 11세기 송나라 사학의 우두머리. 즉 유학이 관학(官學)으로 자리잡는 과정이었고, 이때 불사이군라는 유교적 정치윤리를 위해 풍도를 희생양으로 만들었다는게 저자의 시선이다.
인물 평가가 이토록 가변적일 수 있다는 점이 흥미로운데, 우리의 관심은 일단 풍도의 실제모습일 것이다. 풍도는 이런 신념을 가졌다. '임금이 아니라 나라에 충성한다.' 즉 주변에서 '불사이군이라는데…'하며 '오뚝이 풍도'의 속마음을 떠보려는 이들에게 그가 대꾸한 말이다. 즉 풍도는 기회주의자라기 보다는 그만의 정치철학을 견지했다.
그는 처신도 신중했다. '입은 재앙을 불러들이는 문이요/혀는 몸을 베는 칼이다''전당시(全唐詩)'에 수록된 풍도의 시 '혓바닥(舌詩)'이야말로 권력의 정글 속에서 익힌 처신의 노하우를 보여준다. '만인과 다투지 않는다' '매사에 실무를 중시한다' 등이 이 책이 제시하는 '풍도의 길'이었다.
어떻게 그런 장수(長壽)가 가능했을까. 그것은 난세 탓이다. 당나라 멸망(907년)이후 송나라가 세워지기(960년)전까지 반세기를 명멸했던 5개 왕조 10개 나라가 각축하던 '오대십국'의 시기야말로 풍도의 시대였다. 책은 풍도가 이 난세에 백성들이 입는 참화를 줄이려 노력했음을 실증적으로 규명한다.
풍도의 문화적 치적에도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명저 '중국의 과학과 문명'에서 조지프 니덤이 밝힌대로 '풍도의 경전 인쇄작업은 훗날 송나라 르네상스를 안내하는 힘이었다'는 것이다. 이 번역서에서 우리가 덤으로 확인해볼 것은 '한국의 풍토'가 아닐까 싶다.
이웃 중국.일본 학계의 역사인물에 대한 탄력적인 평가 풍토와 또 달리 유독 한국사회는 경직된 교조적 잣대를 고집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대목 말이다. 책을 읽다보면 현대중국의 넘버투이자 부도옹(不倒翁)들인 주언라이(周恩來)와 덩사오핑(鄧小平)등이 떠오르기도 한다. - 조우석 기자 ( 2003-06-21 )


한겨레신문
풍도(882~954)는 중국 오대십국 시대를 살았던 인물이다. 그는 무려 23년 동안 재상의 자리에 있으면서, 다섯 왕조에 걸쳐 여덟 성씨의 군주 열한명을 섬겼다. 그가 섬겼던 다섯 왕조, 곧 '오대'의 군주 열한명 가운데 두명은 한족의 시각에서 볼 때 이민족인 거란족의 황제다. 가히 중국 역사상 보기 드문 기록적인 관록을 먹은 셈이다.
이런 풍도를 놓고 구양수, 사마광 등 후대 송나라의 논객 혹은 역사가들은 강하게 비판했다.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이른바 '불사이군'의 시각에서다. 요즘 말로 치면 '해바라기 정치인'이라는 비난이다.
< 풍도의 길­나라가 임금보다 소중하니>는 관점에 따라 찬사와 비난이 엇갈리는 '난세의 인물' 풍도의 한평생을 뒤쫓았다. 그가 살았던 당나라 말기에서 오대십국을 거쳐 10세기 후반 송나라에 이르는 사회의 맥락을 더듬고 있는 이 책은 말하자면 '풍도를 위한 변명'이랄 수도 있겠다.
풍도가 살았던 오대십국(五代十國·907~960) 시대란 당나라가 망한 뒤부터 송나라가 생겨날 때까지, 반세기 남짓 동안 화북(황하 중하류지역)에서는 후량.후당.후진.후한.후주 등 '오대', 곧 다섯 왕조가 명멸하고 화남(양자강 중하류지역)에서는 오·남당 등 10개 나라가 있었던 시기다. 풍도는 화북지역의 다섯 왕조를 거치며 정치적 2인자라 할 재상으로 장기 복무했다.
풍도에 대한 비판에 대해 지은이는 풍도가 5왕조 11임금을 섬긴 것은 그가 '임금이 아니라 나라가 소중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라고 반박한다. 이는 맹자가 역성혁명을 옹호하며 이야기했던 '백성은 귀하게 여기고 사직은 그 다음이며 군주는 가볍게 여긴다'는 생각과도 통한다는 것이다.
그는 연달아 새 왕조가 들어서던 오대십국 때의 재상이었지 송나라의 재상이 아니었다고 지은이는 강조한다. 송나라에서 유학이 '관학'이 되면서 굳어지게 되는 '군신' 관념으로 풍도를 평가해선 안된다는 것이다.
물론 그의 '장수' 비결은 그를 통해 정통성을 확보하고자 했던 신흥 군벌(무신) 왕조들의 요청에 부응한 점도 컸다. 풍도가 재임기에 이룬 경전 목판 인쇄사업은 이후 송나라 때의 문화 르네상스를 열었으며, 서양 사가들에 의해서도 송도의 업적은 유럽에서 구텐베르크가 이룬 것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것으로 평가된다.
풍도는 한국 현대사를 수놓았던 이른바 '해바라기' 정치인과 비유될 소지가 있는 인물이다. 그러나 풍도의 삶은 해방 이후 권위주의적 독재정권이 이어지는 과정에서 정권이 바뀌어도 줄곧 권력의 주변을 맴돌았던 군상들과는 다르다고 역사 연구자인 옮긴이는 말한다.
풍도는 어떤 뇌물도 거부할 만큼 청렴했으며, 당대 주류이던 귀족 출신 인사들에 대해선 경멸했지만 보잘것없는 집안 태생이더라도 재능있는 사람들을 중용했기에 인심을 얻었다는 것이다. 양지만을 찾아 헤매는 '해바라기'들과는 차원이 다른 품격을 지니고 있었다는 주장이다. - 허미경 기자 ( 2003-06-21 )


한국경제신문
'입은 재앙을 불러들이는 문이요/혀는 몸을 베는 칼이로다/입을 닫고 혀를 깊이 감추면/가는 곳마다 몸이 편안하리라.'
당나라 말기 오대십국의 질풍노도 시대에 23년동안 재상의 자리를 지킨 풍도(馮道).
그가 남긴 '설시(舌詩)'라는 작품이다.
시골뜨기 출신으로 자수성가한 그는 난세의 격랑 속에서 5왕조 11군주를 섬기며 비난과 찬사를 동시에 받았던 인물. 불사이군의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던 당시에 그는 변절자와 간신이라는 손가락질에도 불구하고 근검절약을 실천하며 백성을 잘 살게 하는데 매진했다.
그의 철학과 인생을 재조명한 평전 <풍도의 길-나라가 임금보다 소중하니>에서 세 가지 명문을 만날 수 있다.
그는 피비린내 나는 쿠데타의 시대에 '임금이 아니라 나라에 충성한다'는 진리를 몸으로 실천했다.
또 영원한 2인자로 불리는 중국 현대사의 주은래처럼 그는 황제에게 칼자루를 겨누지 않으며 백성에게는 덕을 고루 베풀어 '만인과 다투지 않는다'는 신념을 끝까지 지켰다.
이와 함께 청렴하고 박학다식한 자신의 눈으로 업무와 인력관리에 엄격함을 유지하면서 '매사에 실무를 중시한다'는 원칙을 버리지 않았다.
21세기라고 해서 세상의 이치가 달라진 것은 아니다.
역사의 책갈피에서 선인의 가르침을 배우고 자신의 사고와 행동을 추스리는 것은 결국 우리 모두의 몫이다.
- 고두현 기자 ( 2003-06-28 )


한국일보
풍도는 안록산의 난 이후 60년에 걸쳐 군벌들이 쿠데타로 정권을 찬탈해 당나라가 망하고 송나라가 들어서기 전까지 이른바 오대십국(五代十國) 시기의 재상이다. 당이 쓰러진 907년 관리가 돼, 20년 뒤 재상에 올랐으며 오대십국 중 오대에 속하는 5왕조에서, 성씨만 8가지가 되는 11명의 군주 아래서 23년 동안 재상을 지냈다. 대개 그는 희대의 간신이며 변절자, 또는 파렴치한으로 묘사된다.
하지만 일본 역사학자 도나미가 추적한 풍도의 일생은 통념과는 다른 것이다. 평민 출신의 문관으로 한림학사 지위에 올랐지만 남에게 자랑하는 법이 없었고, 중앙의 고위 관리였음에도 불구하고 쑥대와 가시나무로 지은 집에 살며 밭에 나가 농사를 지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그는 여러 군주를 섬겼지만 군주에 충성한다는 표현을 쓴 적이 한 번도 없다. ‘집안에 효도’하고 나서 ‘나라에 충성’한다고 써서 남긴 글은 바로 ‘백성은 귀하게 여기고, 사직은 그 다음이며, 군주는 가볍게 여긴다’는 맹자와 닮았다. ( 2003-06-21 )


                               



[설시 舌詩] - 풍도 지음
({전당시 全唐詩}에 수록)



입은 재앙을 불러들이는 문이요 口是禍之門



혀는 몸을 베는 칼이로다 舌是斬身刀



입을 닫고 혀를 깊이 감추면 閉口深藏舌



가는 곳마다 몸이 편안하리라 安身處處宇



: 풍도의 생각을 압축적으로 대변하는 이 시를 보도 자료의 맨 앞에 올린다. 오랫동안 출처를 제대로 알지 못했던 이 시의 작자가 풍도였음을, 책을 다 만들고 나서야 비로소 알았다 ! <혀>에 대한 풍도의 성찰에는, 오대십국이란 피비린내 나는 쿠데타의 질곡과, 시골뜨기 출신으로 온갖 시련을 극복하고 자수성가한 인물의 인생 고백이 함께 들어 있다.

< 비슷한 고사성어>
駟不及舌 (사불급설)
: 네 마리의 말이 끄는 수레조차도 혀를 따라가지 못한다 ({논어}, [안연]편.)
病從口入, 禍從口出 (병종구입, 화종구출)
: 병은 입으로 들어오고, 화는 입에서 나온다 (진晉나라 부현傅玄의 말)
守口如甁 (수구여병)
: 마치 병에서 물이 새지 않는 것처럼 입을 잘 간수하라 (주자朱子의 [경재잠敬齋箴])

이 책을 만들며
역사적인 인물에 대해, 고정관념에 얽매여 단편적으로 평가할 것인가?

- 불사이군 不事二君도 모르는가?
: 오랫동안 풍문으로만 전해져 오던 '풍도'를 책으로 내면서, <충성과 절개>에 관해 우리가 지닌 역사적 고정관념을 다시 한번 고민하게 되었다. 풍도를 둘러싼 논쟁은 늘 '5왕조와 8성씨 그리고 11군주라는, 그렇게 많은 임금을 섬긴 인물이 어떻게 충신일 수 있는가? 당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불사이군不事二君이란 말도 모르는가? 그건 고려의 정몽주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 아닌가?'에서 시작되곤 했다.

- 충성의 대상은 과연 무엇인가?
: 풍도를 다룬 이 책은 그런 '불사이군'의 질문에 대해, 참으로 놀랍게도 '임금이 아니라, 나라에 충성한다!'는 구절로 응답했다. 맹자가 역성혁명을 옹호한 구절로 유명한 '(나라의)사직이 중요하지, 군주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라는 말이 되살아났다.(12쪽) 우리로 하여금 임금에 대한 충성이 곧 나라에 대한 충성으로 착각하게 만든 것은 무엇이었을까? 우리의 무의식 가운데 뿌리깊게 내려앉아 있는 유교적 군신 개념이 문득 낯설어졌다. 도대체 언제부터 이런 개념이 익숙해진 것일까? 역사적으로는 풍도가 살았던 난세의 오대십국이 끝난 다음, 10세기 후반의 송나라에 들어서서 유학이 관학의 성격을 지니게 되면서, 군신 관념은 비로소 공고화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 풍도라는 인물, 오대십국의 특수성
: 이 책을 만들고 있는 동안, 주위 사람들 가운데 풍도를 아는 사람이 아주 드물었다. 그러나 간혹 그에 대해 아는 사람들은 아주 논쟁적으로 관심을 보였다. 낯설지만 매력적인 인물인 듯했다. 그가 살았던 시대는 거의 60년에 걸쳐 무장, 무인, 군벌 등으로 불리는 군인들이 끊임없이 쿠데타로 정권을 찬탈하던, 이른바 오대십국五代十國이란 시기였다. 풍도를 모르는 만큼, 사람들은 오대십국의 위치나 의미에 대해서도 곤혹스러워 했다. 그 시대는 한국인들이 중국 역사에서 가장 난감해 하는 자리였던 것이다. 당나라 말기의 안록산의 반란에서부터 시작된 절도사들의 반란 풍조가 결국, 당시 세계 최대의 문명국이었던 당 제국을 멸망시켰고, 송나라 이전까지 혈흔이 낭자한 쿠데타의 시대가 펼쳐졌다. 풍도를 이해하는 키워드는 바로 오대십국에서 벌어진 이 연속적인 쿠데타를 어떻게 평가하는가에 달려 있었다.

- 풍도에 대한 오해, 인물 평가의 어려움
: 풍도에 대한 오해는 생각보다 깊고 널리 퍼져 있었다. 하지만 실상 그에 대한 자료는 모두 단편적인 것들뿐이었다. 기존에 나와 있는 {변경}(더난출판사), {간신론}(아이필드) 등에서 다룬 풍도는 단지 송대 이후의 유교적 전통주의자들의 평가만 다루었기 때문에,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그를 <희대의 간신이며 변절자, 그리고 파렴치한>으로 단죄하고 있었다. 이 책을 만들지 않았다면, 우리 역시도 풍도라는 인물에 대해 가볍게 스치고 말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도나미 마모루라는 한 역사학자의 인물 평전을 통해, 풍도의 풀 스토리를 알게 되면서, 역사적인 인물에 대한 평가 행위란 얼마나 주의 깊어야 하는지를 절실하게 깨달았다. 근대 이후 {삼국지}의 조조에 대한 새로운 평가를 시도하는 데서도 잘 알 수 있지만, 그 인물을 둘러싼 시대의 특수성을 파악하거나 인물 자체에 대한 종합적인 사료를 검토하지 않고는, 그런 평가들이란 단지 문학적 혹은 정치적 픽션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 풍도가 23년 동안이나 재상의 자리에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 책을 거의 다 만들었을 무렵에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질문했다. 과연 풍도가 제 한 몸 살아남으려고 몸부림을 친 것은 아닌지, 혹은 어쩌면 당시의 군인들이 쿠데타 정권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덕망있는 그를 앞다투어 등용한 것인지, 다시 물어야 했다. 23년 동안이나 재상의 자리를 지킨 풍도에 비해, 실제 그를 등용했던 5왕조의 평균 수명은 11년이 채 못되었다. 황위를 둘러싼 치열한 쿠데타와 음모 속에서, 풍도가 23년 동안 재상으로 살아남은 사실은 거의 기적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오대십국이 끝나고 나서 등장한 송나라 시대의 역사가들은 그런 풍도를 <지조 없는 파렴치한>으로 몰아세웠다. 하지만 실상 송나라는 전 시대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강력한 중앙집권제을 강화했고, 그에 따라 군주와 신하 사이에도 <엄격한 충성심>이 강조되었던 시기였다. 그러나 풍도가 살던 오대십국은 그런 송나라가 아니었다. 쿠데타로 새로 만든 왕조는 백성들의 기대와 덕망을 갖추기 위해, 그에 걸맞는 인재를 전면에 내세워야 했다. 풍도는 인격적으로 관대하고 명망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청렴결백한 관리였다. 게다가 탁월한 문필가였으며, 뛰어난 행정가이기도 했다. 그의 생존 비결은 쿠데타 왕조로부터의 요청과, 스스로의 분수를 지키고 자신의 역할에 충실했던 그의 실천 철학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 풍도와 비교되는 인물들, 인물 비교의 어려움
: 풍도는 오늘날 여러 인물들과 비교되면서 더 많은 논란을 가져온다. 간혹 스테판 츠바이크가 묘사한, 나폴레옹 밑에서 2인자였던 조제프 푸셰(1759~1820)와 비교하기도 하지만 ({어느 정치적 인간의 초상}[한길사,1998] 참조), 풍도는 푸셰처럼 비밀조직을 만들만큼 권모술수형은 아니었다. 또한 종종 한국의 정치 상황에서 JP나 KG의 정치 편력을 거론할 때 풍도를 언급하기도 한다. 그러나 오대십국이란 시대와 풍도의 청렴결백함 그리고 그의 역사적 체험을 깊이 있게 알면서 논하고 있는 것인지 매우 의문스럽다. 오히려 지금은 그런 단순한 비교 평가를 하기 이전에, 우선 풍도라는 인물 자체을 선입견이나 고정관념 없이 보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한 인간이 극도의 난세를 살았던 기록을 가감없이 읽음으로써, 그리고 우리들 자신의 상황으로 추체험함으로써, 세치 혀로 떠벌이기 이전의 역사적 판단을 우리들 스스로가 먼저 해 보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 한다.
참고로, 현대 중국에서 <영원한 2인자>로 불리는 주은래周恩來(1898~1976)는 권력투쟁을 거치면서, 주석의 자리가 얼마나 고독하고 위험한 자리인지 일찍이 간파한 사람이었다. 그는 중국 역사의 전통에서 황제는 권력을 좇지만, 재상의 역할은 황제와 칼자루를 다투지 않는 것임을 잘 알았던 사람이었다. 2인자로서의 역할은 1인자의 잘못된 생각을 고치도록 권유하여 바로잡을 수는 있지만, 결코 그 이상이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다재다능했고 모난 데가 없었던 팔방미인 주은래가 중국인민공화국의 초대 총리를 27년간 역임했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중국과 중국인의 은은한 초상을 볼 수 있으며, 동시에 풍도의 그림자가 멀리 드리워 있음을 느끼게 된다.


풍도라는 인물과 오대십국이란 시대

- 풍도라는 인물 (15쪽, 323~330쪽의 연표를 참조하시길)
: 풍도는 당나라 말기에 무장 절도사들의 반란이 그치지 않던 시절에 태어났다. 그가 태어나기 8년 전에 황소의 반란이 일어났고, 그가 3세 때 황소의 반란이 종결되었다. 그가 만난 세상은 이미 무장들이 활개를 치면서 모반과 전쟁을 일삼던 시대였다. 그는 귀족 출신이 아닌 평범한 집안 출신이었고, 관리의 길도 그다지 빠르지 않았다. 하지만 글 솜씨가 아주 뛰어나면서도 역사적인 지식까지 잘 갖추고 있어서, 문관으로서의 자질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다.
황소의 부하였던 주전충이 당나라 제국을 멸망시키고, 후량이란 나라를 세우면서 시작된 것이 오대십국 시대였다. 그리고 그 한 가운데 풍도가 있었다. 그는 당 제국이 쓰러지던 907년에 관리가 되기 시작해, 927년에 정식으로 재상에 올랐다. 재상의 자리에 있었던 기간만도 23년에 이른다. 그는 오대십국 가운데 오대에 속하는 5왕조에서, 성씨만 해도 8가지가 되는 11명의 군주 밑에서 재상을 지냈다. 그 속에는 이민족인 거란의 황제들도 2명이나 포함된다.

이 때문에 풍도는 중국역사상 가장 기록적인 관직을 거친 사람으로 남아 있고, 동시에 온갖 비난과 불명예를 얻기도 한 것이다.
오대십국이 끝나고 시작된 송나라 때에는 군주와 신하의 관계가 전시대의 영향으로 더욱 엄격하게 구분되었기 때문에, 풍도에 대한 비난도 거셌다. 그러나 유학적 전통으로부터 자유로와지기 시작한 명나라 때부터는 풍도에 대한 시각도 조금씩 달라졌다. 또한 현대 중국과 일본에서도 활발하게 재평가되고 있는 인물이다. 그에 비해 한국에서는 아직도 전통적인 관념에 따라 <변절자 또는 간신>으로 평가되는 경우가 더 많다. 이런 평가는 중국 역사 가운데 오대십국에 대한 역사적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에 생겼다고도 볼 수 있다.
비록 관리로서의 편력 때문에 비난을 받았으나, 버려진 공자의 묘를 복건한 일, 경전을 목판으로 인쇄하여 널리 보급한 일, 거란의 대학살을 최소화한 일 등은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업적으로 남아 있다.

-오대십국이란 시대 (907~960)
: 907년에 당나라가 멸망한 다음부터 960년에 송나라가 건국할 때까지 반세기 동안에, 중국에서 건국과 멸망을 거듭했던 수많은 나라들이 있었다. 황하 중하류 지역인 화북에서는 후량, 후당, 후진, 후한, 후주라는 5왕조가 차례로 등장했다. 왕조 이름 앞의 '후'는 역사가들이 그전에 있었던 왕조들과 구별하기 위해 붙인 것이다. 그 무렵에 양자강 중하류 지역인 화남에서는 오, 남당, 오월, 민, 형남, 초, 남한, 전촉, 후촉, 북한이라는 10나라가 있었다. 이들 5왕조 10나라를 통틀어서 '오대십국'이라고 부른다.
이 책의 주요 내용은 이 가운데 '오대'라고 하는 5왕조의 운명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오대의 왕들은 거의가 다 절도사 출신의 무장들이었다. 더군다나 그들은 북방 이민족 출신의 군벌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부족 안에서 독자적으로 왕위를 추대한다든지, 세습제보다는 양자들 중심의 친위 부대를 중시하는 경향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 까닭에 그 어느 시대보다 정권 교체가 유달리 더 많았던 것이다. 또한 그 무렵 북방에서는 거란이 요나라를 건국한 다음에 막강한 힘을 앞세워 남쪽으로 침입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왕조들은 안팎으로 전쟁과 쿠데타가 그칠 날이 거의 없었다. (14쪽에서 수록)
이런 상황에서 문신들의 역할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또한 무신 정권자들이 왕조 운영이라든가 역사적인 지식이 부족했기 때문에, 그들은 뛰어난 문신이면서 행정력을 두루 갖춘 인물을 등용함으로써 자신의 정통성을 확보하려고 하기도 했다.


풍도에 대한 평가

부정적인 평가

'네 왕조에 봉사하며 재상을 지냈는데, 과연 그가 충성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한 여자가 두 지아비를 섬김은 개인의 불행이다. 하물며 풍도는 몇 번씩이나 그랬던 사람이었다.'
―설거정(송나라의 문인, {구오대사})

'숱한 왕조와 거란을 번갈아 섬겨 온 풍도가 스스로 그동안 받았던 관직을 영광으로 여기면서, 집안에 효도하고 나라에 충성했다고 말하고 있다.'
―구양수(송나라의 문인, {신오대사}에서 풍도가 쓴 자서전을 비난하며)

'풍도가 재상으로서 다섯 왕조와 여덟 성씨를 섬긴 일은 나그네가 객방을 스쳐 지나가는 일과 매한가지다.'
―사마광(송나라의 역사가, {자치통감}, 291권 [후주기], 2.)

긍정적인 평가
'풍도를 비판한 인물들로 하여금, 자고 나면 왕조가 바뀌는 시대에 한번 살도록 해 보고 싶다...내가 풍도를 중국의 걸물에 선정한 것은 일종의 문제 제기이다...그에게 충절을 다하라고 하지만, 풍도가 살았던 때에 과연 충절을 다할 만한 왕조가 있었던가? 왕조 교체 과정에서 백성들의 대참사가 비교적 적었던 것은 풍도가 절개를 중시하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 진순신 (일본의 대표적인 역사소설가, {중국걸물전}에서)

'만약 임금이 백성을 편안하게 해 주거나 먹여살리지 못한다면, 신하라도 백성을 편안하게 해 주거나 먹여살려야 한다. 따라서 풍도는 신하라는 사람이 원래 해야 하는 책임을 완수했던 것이다...풍도가 비록 50년 동안 수많은 왕조에 봉사했지만, 백성들이 끝끝내 전란의 참화를 모면할 수 있었던 까닭은, 풍도가 백성을 편안하게 해 주고 먹여 살리려고 노력한 덕분이다.'
― 이탁오(명나라의 독창적인 사상가, {장서藏書}, 68권.) ({풍도의 길}, 12쪽.)

'풍도와 그의 동료가 중국의 인쇄사에서 이룩한 업적은 유럽에서 구텐베르크가 이룩한 것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다. 풍도가 간행한 경서는 인쇄를 일종의 문화적 역량의 차원으로 끌어 올려, 송나라 시대에 문화가 크게 일어날 수 있도록 이끌었다.'
―T.K. 카터({중국의 인쇄술 발명과 서양으로의 전래})({풍도의 길}, 294~5.재인용)

'풍도의 구경九經 인쇄는 송나라 시대의 르네상스를 안내하는 하나의 힘이 되었다.'
―조제프 니덤({중국의 과학과 문명} 6권, 74쪽.)


풍도의 행적과 신념 (이 책의 쪽수에서 인용)

- 근검절약하고, 선행을 묵묵히 실천하는 풍도
'......문관으로서 명예로운 한림학사의 지위에 올랐지만, 결코 남에게 자랑하는 법이 없었다. 그는 띠로 엮은 초막집에 침대도 만들지 않고 그냥 짚 위에서 잤다. 자기가 받은 녹봉도 하인들에게 다 나누어주었고, 먹거나 마실 때도 병사들과 식기를 같이 사용했다......간혹 진나라 장군 가운데서 몇몇은 제 마음대로 주민들을 약탈해 노예로 삼았고, 문관인 풍도에게 노략질한 부녀자를 선물로 보내기도 했다. 그럴 때 풍도는 잠자코 사람을 넘겨받아 데리고 있다가, 조용히 가족 곁으로 되돌려 보냈다고 한다.' ({풍도의 길}, 121쪽)
'풍도가 상을 치르는 동안......그는 자신의 녹봉을 마을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면서 환난을 구제하려고 했다. 중앙 정부의 고위 관리였음에도 불구하고, 쑥대와 가시나무로 지은 집에 살면서 밭에 나가 농사를 지었고, 스스로 섶을 등에 지고 나르기도 했다. 논밭이 황폐해져 경작할 수 없거나 경작할 능력이 없는 사람이 있으면, 밤중에라도 가서 대신 경작해 주었다. 풍도에게 도움을 받은 사람이 고맙다며 찾아와 예의를 갖출 때도, 그는 조금도 우쭐거리지 않았다. 또한 중앙 정부의 요인이었던 풍도에게 지방 관리들이 존경의 뜻을 담아, 곡식이나 비단을 보내 와도 받지 않았다.' ({풍도의 길}, 123~4쪽)

- 풍도의 박학다식함과 <만인과 다투지 않는다>는 신념
'명종이......과감하게 풍도를 재상으로 삼은 이유에는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풍도의 박학다식함이었다......풍도는 청년 시절부터 글을 다루는 신하로서......직책을 훌륭히 수행했기 때문에, 유학에 조예가 깊은 신하로서의 관록을 당당히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또 하나의 이유는 풍도가 만인과 다투지 않는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는......어떤 일에도 남과 경쟁하거나 남을 욕하지 않고, 스스로를 엄격하게 다스리는 성격을 지니고 있음에......이런 인물은 특히 난세에서 얻기 힘든 존재였다.' ({풍도의 길}, 150쪽)

- 풍도가 후당의 명조에게 올린 <골짜기의 경험>과 <섭이중의 사회시> (165~168쪽)
[이하, 자료 분량상 {풍도의 길}에서 주제와 쪽수만 간락하게 수록했음]

- 거란에 사신으로 갔을 때 발휘한 지혜 (215쪽)
- 문신으로서 전란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218~219쪽, 255쪽)
- 공자묘를 복건하게 된 계기 (231~233쪽)
- 거란의 대학살을 저지하다 (236~237쪽)
- 거란에 포로로 잡힌 백성들을 구출하다 (248쪽)
- 나라가 임금보다 소중하니, 임금이 아니라 나라에 충성한다는 것 ! (263~268쪽)
- 유머 있는 사람, 풍도 (269~274쪽)
- 경전 목판 인쇄 사업을 추진하고 완성하다 (294~296쪽)
-'폐하께서는 산이 되실 수 없습니다!' (299쪽)


- 근검절약하고, 선행을 묵묵히 실천하는 풍도
'......문관으로서 명예로운 한림학사의 지위에 올랐지만, 결코 남에게 자랑하는 법이 없었다. 그는 띠로 엮은 초막집에 침대도 만들지 않고 그냥 짚 위에서 잤다. 자기가 받은 녹봉도 하인들에게 다 나누어주었고, 먹거나 마실 때도 병사들과 식기를 같이 사용했다......간혹 진나라 장군 가운데서 몇몇은 제 마음대로 주민들을 약탈해 노예로 삼았고, 문관인 풍도에게 노략질한 부녀자를 선물로 보내기도 했다. 그럴 때 풍도는 잠자코 사람을 넘겨받아 데리고 있다가, 조용히 가족 곁으로 되돌려 보냈다고 한다.' ({풍도의 길}, 121쪽)

'풍도가 상을 치르는 동안......그는 자신의 녹봉을 마을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면서 환난을 구제하려고 했다. 중앙 정부의 고위 관리였음에도 불구하고, 쑥대와 가시나무로 지은 집에 살면서 밭에 나가 농사를 지었고, 스스로 섶을 등에 지고 나르기도 했다. 논밭이 황폐해져 경작할 수 없거나 경작할 능력이 없는 사람이 있으면, 밤중에라도 가서 대신 경작해 주었다. 풍도에게 도움을 받은 사람이 고맙다며 찾아와 예의를 갖출 때도, 그는 조금도 우쭐거리지 않았다. 또한 중앙 정부의 요인이었던 풍도에게 지방 관리들이 존경의 뜻을 담아, 곡식이나 비단을 보내 와도 받지 않았다.' ({풍도의 길}, 123~4쪽)

- 풍도의 박학다식함과 <만인과 다투지 않는다>는 신념
'명종이......과감하게 풍도를 재상으로 삼은 이유에는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풍도의 박학다식함이었다......풍도는 청년 시절부터 글을 다루는 신하로서......직책을 훌륭히 수행했기 때문에, 유학에 조예가 깊은 신하로서의 관록을 당당히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또 하나의 이유는 풍도가 만인과 다투지 않는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는......어떤 일에도 남과 경쟁하거나 남을 욕하지 않고, 스스로를 엄격하게 다스리는 성격을 지니고 있음에......이런 인물은 특히 난세에서 얻기 힘든 존재였다.' ({풍도의 길}, 15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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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세에 어떻게살 것인가


풍도의 길과 악비의 길






악비사당

악비사당

 

중국 역사에서 중원지방은 두 차례 극심한 혼란기를 겪었다. 5호 16국의 시대라고 부르는, 서진(西晉)이 멸망한 후 북위(北魏)가 화북을 통일하기까지의 시기와, 5대 10국의 시대라고 부르는, 당(唐)나라가 멸망한 후 북송(北宋)이 전 중국을 통일하게 되기까지의 시기가 바로 그 혼란기이다.

 

이 시기에 중원지방에서는 이민족의 말발굽 소리와 전쟁의 불길이 끊이지 않았으며, 이 두 차례의 혼란기를 겪은 이후 중원지방은 역사의 중심에서 점차 멀어졌다.

 

명·청 시대에 정치의 중심은 베이징으로 옮겨갔고, 지식인의 대거 이주와 생산력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말미암아 경제·문화의 중심지는 강남지역으로 바뀌었다. 이런 점에서 뤄양(洛陽)과 카이펑(開封)은 중원지방의 영화를 오로지 기억으로 간직한 도시이다. 그 영화의 기억을 우리에게 한사코 현실로 각인시키려 드는 것이 바로 카이펑의 번성함을 그린 장택단(張擇端)의 ‘청명상하도(淸明上河圖)’이다.

 

존경의 길과 치욕의 길… 역사의 평가는 합당한가

 

나는 뤄양의 북쪽에 있는 망산(邙山), 그 때문에 우리가 북망산(北邙山)이라고 부르는 곳에 묻혀 있는, 한족·조선족·돌궐족 등 다양한 민족의 인물들을 둘러보면서 중원지방의 역사를 떠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수많은 민족들이 중원으로 몰려왔던 평화의 시대와 혼란의 시대를 상기하면서 나의 생각은 자연스럽게 ‘풍도(馮道)’라는 특이한 인물에 미치고 있었다. 5대 10국의 혼란한 시기를 한 몸에 고스란히 짊어지고 살아간 이 특이한 인물의 생애를 나는 쉽사리 잊어버릴 수가 없었다.

 

난세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해 풍도의 생애만큼 시사적인 생애는 달리 없다. 중국 사람들에게 이 질문을 던진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저하지 않고 악비(岳飛)처럼 살아야 한다고 말하겠지만 나는 그렇게는 생각하지 않는다. 악비처럼 충의의 길을 걷는 것은 후세가 기억해주는 영광의 길이며, 이미 숱하게 많은 사람들이 귀감을 보여준 길이다. 그러나 풍도가 걸어간 길은 모멸의 길이고 귀감이 없는 독특한 고난의 길이다. 그래서 나는 풍도의 길이 악비의 길보다 더 어려웠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풍도는 당나라 말기 ‘황소(黃巢)의 난’이 한창일 때 태어나, 5대 10국이 교체되는 혼란기에 다섯 왕조, 여덟 성씨, 열한 명의 천자를 섬기며 50여 년 동안 고위관직에 있었다. 이 난세에 30년은 고위관리로, 20년은 재상으로 지내면서 천수를 모두 누리고 73살에 죽었으니 참으로 대단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떻게 처세를 했으면 그처럼 빈번하게 바뀌는 왕조에서 그렇게 오랫동안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일까.

 

반면에 악비는 풍도보다 상대적으로 안정된 북송시기에 태어났지만 천수를 다하지 못하고 39살의 젊은 나이에 살해당했다. 금(金)의 침입으로 북송(北宋)이 멸망할 무렵 의용군을 조직하여 후베이(湖北) 지역의 실력자가 된 그는, 악가군(岳家軍)이란 정병을 양성하여 송나라 역사에서 거의 유일하게 금나라와 싸워 이기는 전공을 올린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그의 전공과 항전의지가 당시의 재상으로 주화파였던 진회(秦檜)의 눈에 거슬렸기 때문에 그는 비극적인 죽임을 당했다.

 

이후 시간이 흐르면서 악비(岳飛)는 관우(關羽)와 함께 중국 사람들이 충절의 화신, 애국의 화신으로 존경해 마지않는, 대표적 인물인 된 반면, 풍도(馮道)는 한족의 왕이건 이민족의 왕이건 가리지 않고 섬긴, 지조 없는 경우의 대표적 인물이 되었다. 악비는 ‘악왕(岳王)’이란 명칭에서 보듯 중국 인민들이 존경하며 기억하는 훌륭한 사람이 되었고, 풍도는 사마광(司馬光)의 평가에서 보듯 부끄러워 할 줄 모르는 삶을 산 사람이 되었다. 두 사람에 대한 사람들의 기억과 역사적 평가는 이렇게 엇갈리지만 우리는 이러한 평가를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두 사람이 걸어간 길에 대해 후세 사람들이 ‘존경의 길’과 ‘치욕의 길’이라는 평가를 내리는 것은 합당한 것일까? 나는 중원지방의 이곳저곳을 여행하며 당나라 멸망이후 중국북방에서 명멸한 5대 10국의 역사를 돌이켜 보는 가운데 올바른 지식인의 길이 단순한 것도 명쾌한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거듭 확인하고 있었다.

 

풍도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하게 만든 것은 역설적이게도 악비사당이었다. 항조우(杭州)의 악비사당에서 받은 충격을 나는 카이펑의 악비사당에서도 마찬가지로 받았다. 그것은 이제 역사의 죄인이 되어 중국인민들 앞에 꿇어 앉아 있는 진회 부부와 그 동조자들의 초라한 조각상 때문이었다. 살해당한 악비는 웅장한 사당에 모셔져서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칭송하는 대상이 되어 있는 반면 악비를 모함하여 죽게 만든 사람들은 무방비 상태로 모멸과 가해의 대상이 되어 있는 현실을 보면서 나는 역사적 삶을 산 인물들에 대한 평가를 다시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조각

(위)악비조각, (아래)악비사당에 있는 간신 조각

 

위기의 시대에 지식인으로 산다는 것

 

악비가 한족의 민족영웅으로 떠받들어지는 데에는 분명히 송나라의 치욕에 대한 보상심리가 작용하고 있다. 악비가 살해당한 후 남송은 금나라와 굴욕적인 화의조약을 맺었다. 금나라에 대해 자손대대로 신하의 예를 지킬 것을 분명히 하고, 회하(淮河) 이북의 땅이 금나라 땅이라는 것을 인정하며, 매년 은 25만 냥 비단 25만 필을 바칠 것을 약속한 것이다. 한족의 송나라가 오랑캐 여진족의 금나라에게 참담하게 굴복한 것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굴복은 남송의 정치적·군사적 여건이 낳은 불가피한 결과이기도 했다. 경제적으로는 부강했지만 군사적으로는 취약했던 송나라는 이미 북송시기에 서하(西夏)와 막대한 경제적인 보상을 통해 평화를 사는 조약을 맺은 바가 있었다.

 

또 수도인 카이펑이 함락되고 휘종(徽宗)과 흠종(欽宗)이 포로로 끌려가는 ‘정강의 변’ 이후 건국한 남송은 군사적으로 줄곧 금나라에게 패배하면서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병자호란에서 일방적으로 패배한 조선왕조는 청나라에 대해 신하의 예를 취하는 굴욕적인 화의조약을 맺었다.

 

그렇지만 이후의 역사는 현실적인 주화파보다는 비현실적인 주전파들을 더 높이 평가하며 기리는 방향으로 흘러왔다. 김상헌과 삼학사가 충의지사로 추앙받은 반면 화의를 주도한 최명길이 나라를 치욕스럽게 만든 사람으로 비난 받은 것에는 분명히 비현실적인 명분론과 보상심리가 작용하고 있다.

 

풍도가 선택해서 살아간 길은 지극히 현실적인 길이었다.

그는 힘 있는 절도사들이 수시로 황제의 자리를 찬탈하는 현실 속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정확히 구별했다.


나라의 안정을 위해, 백성의 안녕을 위해, 문화의 보존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혼신의 힘을 다하면서

 황제의 자리가 바뀌는 것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예컨대 석경당(石敬塘)이 거란의 도움을 받아 황제가 된 후 고마움을 표시하기 위해 풍도를 사신으로 보내려 했을 때 그는 “폐하께서는 북쪽 왕조의 은혜를 입었으며, 신은 폐하의 은혜를 입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면서 기꺼이 그 직을 수행했다. 그랬기 때문에 명분론에 입각한 정통사학의 거두인 사마광은 풍도를 이렇게 평했다.

 

“정절을 지키는 여인은 두 지아비를 섬기지 않고, 충성스런 신하는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 (……) 충성스럽지 않은 신하는 제아무리 재능이 많고 공적이 빼어나도 훌륭하다고 볼 수 없다. (……) 풍도가 재상으로서 다섯 왕조와 여덟 성(姓)을 섬긴 일은 나그네가 객방을 스쳐가는 일과 마찬가지다. 아침에는 서로 원수였는데 저녁엔 임금과 신하 사이로 변하자, 표정과 말을 바꾸면서도 부끄러워 한 적이 없다. 큰 절개가 이랬으니, 설사 그가 착한 일을 몇 가지 했다고 한들 어찌 괜찮다고 말하겠는가?”

 

풍도에 대한 사마광의 평가는 이후 거의 그대로 받아들여졌지만 나는 다르게 생각하고 싶다. 아마도 풍도가 “나그네가 객방을 스쳐지나가는 것처럼” 생각한 것은 자신이 아니라 황제였을 것이다. 맹자가 “나라의 사직이 중요하지 임금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했던 것처럼 풍도가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황제가 아니라 나라, 다시 말해 나라를 구성하는 백성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풍도는 평생을 고위직에 있었지만 사사로운 이익을 취한 일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간신이었다면 아부와 모략을 일삼았어야 하는데 그는 그런 적이 없다.

 



그는 가난한 농민 출신으로 오로지 자신의 능력과 노력에 의해 재상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면서 혼란의 시대에 백성을 걱정하고, 전화가 가져오는 살상을 막고, 나라를 하루 빨리 안정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나는 그가 명종 앞에서 외운 섭이중(聶 耳中)「농부를 아프게 하는 노래」란 시에 나오는 “우리들 바라건대 군주의 마음이/밝은 빛을 내는 촛불로 되어/그저 호사스런 술자리만 비추지 말고/유랑빈의 빈집까지 두루두루 비추기를이란 구절이 그의 자세와 마음을 잘 대변해준다고 생각한다.






위기의 시대에 한 지식인이 올바르게 살아가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복잡하고 어려운 일이다.


지나친 이상주의자로 살아가는 것도 현실주의자로 살아가는 것도 올바른 지식인의 길은 아니다.


강렬한 명분을 내세우며 세상을 등지는 일은

세상에 참여하면서 자신을 관리하는 일에 비해 훨씬 더 쉬울 수도 있다. 



김병익의 말처럼

지식인은 자신이 신봉하는 이데올로기와 발을 디디고 있는 구체적 현실 사이에서

“환상에 빠지지도 않고 공동체적 관련성을 버리지도 않을 때”

올바른 길을 걸을 수 있다.


그렇다면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 속에서 누가 과연 그렇게 살 수 있을까. 나는 불경스럽게도 풍도의 길이 그 어려운 길의 한 모범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악비사당을 떠났다.

 

 

 

자료제공 LUXMEN
발행일 2014.02.06기사입력 2014.02.06



탕정삼성 트라팰리스 에서 펌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