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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군이 군사적으로 성공한 이유는 군 고유의 구조가 아닌 작전술이 우수했기 때문이었다 / 수부타이의 전략적 감과 안목을 생각해보면

modest-i 2015. 8. 17. 14:41

몽골군은 자국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긴 보급로와 연락망에 의존했다.

 

몽골군이 작전 전역 내에서 원활하게 움직일 수 있었던 것은 우수한 정찰 능력을 유지한 덕분이었다.

 

 

 

 

몽골인 중 누구도 중부 유럽에 가본 사람이 없어 군 지휘관들에게 중부 유럽은 낯선 땅의 연속이었다.

 

 

몽골군이 군사적으로 성공한 이유는 군 고유의 구조가 아닌 작전술이 우수했기 때문이었다.

 

 

 

군 역사를 통틀어 보아도 승리를 결정짓는 요인은

군대의 특성 그 자체보다는

력있는 지휘관이 군대를 어떻게 이끌어 가느냐에 있었다.

 

 

 

결국 앞선 수 세기 동안 전장을 누볐던 그 어떤 유럽 지휘관보다도

훨씬 더 우수한 지휘관이 수부타이라는 이름으로 몽골군에 몸담고 유럽 침공을 주도했던 것이다.

 

 

 

헝가리군이 전멸하면서 몽골군은 드네프르 강에서 오데르 강 그리고 발트 해에서 다뉴브 강에 걸친 동유럽 전 지역을 지배하게 되었다. 그들은 4개월 이내에 총합이 아군의 5배나 되는 기독교 군대들을 제압해냈다. 수부타이는 헝가리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고 수많은 마을을 파괴하며 나라 구석구석을 약탈했다. 몽골의 침략으로 헝가리가 전체 인구의 50%를 잃었다는 추산도 있다. 수부타이 대열은 다뉴브 강이 얼어붙자마자 강을 건너 서쪽으로 향했다. 선봉은 줄리언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 북부로 진입하고 정찰부대는 다뉴브 강 유역을 지나 빈의 성벽으로 접근했다. 유럽 군주들은 두려움에 떨며 그저 무력하게 야만인들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었다. 몽골군이 빈을 정찰하고 있을 때 카라코룸에서 화살전령이 와서 오코타이칸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몽골 법에 의하면 모든 왕실 자손은 수도로 돌아와 차기 칸을 뽑는 선거를 치뤄야 했다. 수부타이는 정복전쟁에 나가 있던 세 명의 왕자에게 왕족의 의무를 지키게 헀다. 몽골군 대열은 진군을 멈추고 동쪽으로 방향을 돌려 카라코룸으로 다시 긴 행군을 시작했다. 그들은 달마티아와 세르비아, 불가리아 북부를 지나며 이동했다. 그들은 지나쳐가는 이 땅들을 모두 파괴하고 다뉴브 강 하류 너머로 사라진 뒤 다시는 유럽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몽골은 바투를 지도자로 하여 러시아 땅에 자신들의 국가인 킵차크한국을 세우고 거의 3세기 동안 몽골의 굴레를 씌웠다. 절대권력을 전적으로 활용하는 차르의 정치적 지배 수단도 서양보다는 몽골의 방식에 훨씬 가까웠다.

 

수부타이의 서유럽 공격은 시작하자마자 끝나버려 1242년 말에 몽골군이 동쪽으로 철수한 뒤 두번 다시 유럽을 위협하지 못했다. 몽골의 침공이 유럽 대공과 성직자들을 죽음으로 몰고 가며 남긴 커다란 상흔은 금방 잊혔고 유럽은 몽골군을 겼었음에도 서방의 군사훈련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폴란드를 경계로 동쪽에 위치한 러시아는 몽골의 공격과 지배를 받아 몽골식 정치, 군사훈련, 국민성 등이 형성되어 영속적으로 뿌리내리게 된다. 레그니차 전투 이후 300년이 넘도록 몽골이 러시아의 중심 지역을 지배함으로써 절대 권력을 유산으로 물려받은 러시아는 정치적 지배 수단과 권력에 대한 개념이 몽골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해방론과 르네상스적 문화 발상은 러시아에서 꽃피우지 못할 정도였다.

 

수부타이는 73세에 세상을 떠났다. 궁정생활을 따분해했던 그가 헝가리 및 서유럽과 오랜 전쟁을 치르고 돌아왔을 때는 68세의 나이였다. 수부타이는 오고타이칸이 사망한 뒤, 바투와 귀위크가 권력 다툼을 벌이는 데 진저리가 난 나머지 수도를 떠나 다뉴브 강 기슭의 야영지로 향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의하면, 수부타이는 자신의 거처에 있는 계급장을 모두 내다버리고 여생동안 가축을 돌보고 손자 아추가 몽골 전사가 되기 위해 기량을 쌓는 모습을 지켜보며 지냈다고 한다. 다뉴브 강은 몽골 초원에서 서쪽으로 한참 떨어진 곳이라 수부타이가 그렇게 먼 곳에서 은퇴생활을 하기로 한 것이 이상해 보일 수도 있다. 당시 바투의 지배 범위는 킵차크한국과 러시아, 다뉴브 강 유역 등이었는데, 수부타이가 바투의 부하였던 자신의 아들 우랑카타이와 가까이 있기 위해 다뉴브 강 기슭으로 온 것일 수도 있다. 수부타이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32개 민족을 정복했고 65차례의 대격전에서 승리했다. 그야말로 위대한 장군들 중 누구도 능가할 수 없었던 업적이다.

 

 

 

칭기즈칸의 위대한 장군 수부타이......리처드 A 가브리엘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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