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음의 향기, 비움

이병복의"건강 비결? 좋다, 쓸쓸하다, 화난다, 오만 가지 감정을 고루고루 다 가져야 해요. 속상하고, 즐겁고, 약오르고 슬픈 감정을 마음껏 가져요

modest-i 2015. 5. 10. 09:59

Why] [신정선 기자의 눈빛] 뒷광대 50년… 연극史가 된 아흔살 '열정 소녀'

 

 

이해랑연극상 특별상 받은 '무대미술 개척자' 이병복씨
"난 지문이 없어… 하도새끼들 붙들고 조몰락거리다보니까"

"평생 무대 뒤에서 일을 했는데, 저 같은 사람은 무대 뒤에서 있어야 하는데, 이 영광스러운 앞 무대에다가 세워주셨으니 정말 송구스럽고 되게 힘들어요. 한눈 한 번 팔 여유 없이 발등에 불이 떨어지니까 북 치고 나팔 불었는데, 그러다 보니 제 몫의 시간이 가고 말았네요. 어휴, 감사드리고…. 시간이란 상(賞)이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말끝에 눈물이 맺혔다. 지난달 20일 서울 중구 조선일보사미술관에서 제25회 이해랑연극상 특별상 수상자로 연단에 선 무대미술가 이병복씨는 검은 한복 차림이었다. 1991년 한국인 최초로 '프라하 세계무대미술경연대회'에서 무대의상상을 받았을 때 "아무도 한국을 몰라서 오기로 입었다"던 한복이다. 곧추세우듯 도도한 자존심을 드러낸 흰 동정도 여전했다.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독특한 미감'(유민영 서울예대 석좌교수)의 예술가, 배경이나 장치로만 여겨지던 무대 미술과 도구를 예술의 지위로 끌어올린 개척자, 살아 있는 연극사로 불리는 그는 시상식 참석자들을 향해 몇 번이나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머리 위로 시간이라는 상을 대신이라도 할 듯 기립박수가 쏟아졌다.

올해 우리 나이로 구순(九旬). 세상에 알려진 약력에는 1927년 경북 영천생(生)이지만, 실제로는 1926년 태어났다. 아들로 태어나지 못한 죄로 한 해가 지나서야 호적에 올라갔다. "내가 사주에 쥐가 셋이래. 쥐가 환한 데 돌아다니는 거 봤어요? 껌껌한 데서 후다닥 댕기지. 늘 그늘에서, 뒷전에서 남들 안 보이게 살았지. 집에서는 아버지 뒤에서, 남편 뒤에서, 그리고 무대 뒤에서…."

무대 뒤에서 보낸 세월이 50년, 스스로를 '뒷광대'로 부르는 그를 지난 4일 서울 장충동 작업실에서 만났다.

[Why] [신정선 기자의 눈빛] 뒷광대 50년… 연극史가 된 아흔살 '열정 소녀'
아흔살 "열정소녀" 원로 무대미술가 이병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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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광대 50년… "에라, 지성이면 감천"

지금이야 무대 디자인, 소품, 의상 담당이 전문적인 분야로 인정받지만, 50년 전만 해도 연출가와 배우 외에는 '기타 등등'이었다. 숙명여고를 나와 이화여대 영문과를 졸업한 이병복은 1948년 극단 여인소극장의 연극에 참여하면서 처음 무대에 발을 디뎠다. 크지 않은 배역으로 한 번 무대에 섰다가 "광대짓이 웬 말이냐"며 노기등등한 할머니가 곡기를 끊는 소동이 빚어졌다. 다시 연극을 시작한 것은 1966년. 프랑스 유학을 마치고 의상 디자이너로 일하던 그가 연출가 김정옥씨와 극단 자유(自由)를 창단한 때다. 박정자, 김용림, 윤소정, 김혜자가 창단 단원이었다. 극단 자유는 120편가량을 올리며 연극 열기에 불을 지폈다. 극단 대표로, 아무도 안 하려던 뒷일 챙기기에 나선 그는 무대 의상은 물론이고 적당히 배치하면 끝이던 소품을 "내가 맹근(만든) 배우, 내 새끼"로 부르며 직접 만들었다. "내가 지문이 없어. 지워져버렸어. 하도 새끼들 붙들고 조몰락거리다보니까. 내 소품도 다 배우야. 대사가 없을 뿐이지."

―의상 디자이너로 돈도 벌고 명성도 얻었는데, 어떻게 연극을 하게 되셨나요.

"아직 무대 의상이라는 개념도 없던 시절에 나도 잘 모르면서 의상을 전담하게 됐지. 연극을 하려고 극단은 만들었는데, 돈이 없어서 남에게 맡길 수도 없었고. 마침 옷집을 하니까 공방도 있고 해서 직접 만들기 시작했어. 살다가 보면 음양이, 기복이 한도 끝도 없이 눈 감는 날까지 지속이 되지 않나."

―연극의 어떤 점에 끌렸나요.

"껌껌하고 텅 빈 무대에 올라가면 '아, 이게 내 세상인데, 이게 내 건데' 싶거든. 아무것도 없는 무대가 가장 연극적이야. 내가 어설프게 만들어 붙여봤자 거짓말이고. 깜깜한 무대에 비쳐 들어오는 광선, 그 냉기, 귀신스러움. 이걸 상하게 해서는 안 된다, 그대로 흡수되는 환경을 만들어야겠다고 달려들었지. 그 뒤로 이제까지 무대 뒤에서 검은 포장 쳐놓고 기어다니고, 전깃줄 걸려서 자빠지고, 짐짝 들고 다니다 거꾸러지며 살았지."

―남들보다 주목받고 싶은 것이 예술가의 생리입니다. 앞에 나서고 싶지 않았나요?

"팔자라고 생각했지 뭐. 주변에서 다들 그랬지. 빛은 딴 놈이 다 보는데 어떻게 지내느냐고. 나도 매일 자문자답해요. 아마도 내가 나 자신을 보는 눈이 있어서 그런 거 같아. 그 일에 미쳐서 일할 수 있는 나를 내가 알잖아. 찍소리 안 하고 이걸 할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생각으로 엎드려 살다 보니까 그 세월 다 갔지."

그의 작업실은 장충동 도로변 5층 건물의 4층에 있다. 장충단공원이 내려다보이는 커다란 창가에 40년이 넘은 재봉틀과 다리미를 나란히 뒀다. 그의 '새끼'가 만들어지는 곳이다. 다리미 옆구리에 'General Electric'이라고 적힌 영문자는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닳았는데, 반질반질한 윤기는 방금 전에 닦은 듯하다. "이 다리미가 아직도 제 몫을 하나요" 물었더니 "그럼, 나도 40년 더 됐는데 쓰잖아" 했다. 그는 수십 년을 헤아리는 반짇고리와 가위를 들고 거북등 같은 손끝을 놀려 한 땀 한 땀 바느질을 한다.

―뒤에서만 어떻게 버티셨나요.

"더러는 싸할 때 있었지. 일하면서 버텼지. 미친 것처럼. 일하면 아픈 걸 모르거든요. 속상하고 말 못 할 때도 일을 하고 있으면 시간이 가. 아무리 힘들고 슬퍼도 온머리와 온마음으로, 필사적으로 덤비면 돼. 에라, 지성이면 감천이지, 내가 언제는 자신 있어서 일했나. 그 마음만 있으면 이 세상에 못 할 일이 없어."